언년이

By 2015년 4월 30일 미분류

2013.12.23

언년이는 1931년 파주에서 태어났다

언년이는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하지만 그 시절 무릇 딸이란 존재가 그렇듯 아무도 제대로 가르치려 하지 않았고 언년이는 혼자서 부득부득 야학에 나갔다. 언년이는 공부를 잘했다. 같이 야학에 나가던 남동생보다도 잘했다. 가마니로 겨우 가려진 옆반에서 남동생은 공부를 못해서 매를 맞았지만 언년이는 우수상을 받고 상품으로 운동화도 받아내었다. 고무신이나 나막신을 신던 시대, 귀한 운동화였지만 그 시절 딸이란 존재가 그렇듯 좋은 것은 모두 아들에게 양보해야 했다. 남동생은 소풍날 처음으로 운동화를 신고 나갔다. 고무신, 나막신이나 신던 발이 운동화에 적응할리 만무했고, 벗은 운동화을 함부로 들고 다니던 남동생은 결국 잃어버렸다. 그래도 언년이는 그 시절 악착같이 국문을 배워놔서 지금 버스 노선표를 읽고 버스를 탈 수 있으니 좋다며 말갛게 웃었다.

20살의 언년이에겐 아들이 하나 있었다. 첫 아이었고 그래서 더 소중했다. 그 해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모두들 세간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랐지만 언년이는 갓내기를 데리고 그 험한 길에 오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명운은 하늘에 맡기고 집에 숨었다. 그동안 동네는 인민군 국방군이 번갈아가며 차지했다. 남편은 이북 사람이었지만 붉은 완장을 차길 거부했고 그래서 그 동란과 살육을 무사히 피할 수 있었다.

하루는 언년이가 아기를 업고 장에 가는 길이었다. 대청에 앉아 장죽을 문 한 노인이 언년이에게 말을 걸었다. 이 혼세에 어린 어미가 아이를 기르기도 고될 것이요. 아이가 참 잘생겼으니 내게 주면 내가 잘 키워주겠노라고.
언년이는 단박에 거절했다.

하루는 일 나갔다 돌아올 남편을 위해 윗목의 화로에 두부찌개를 올려놓았다. 아랫목의 아기는 숨 고르며 자고 있었고, 그 사이에 언년이는 물을 길으러 우물로 향했다. 우물은 집에서 거리가 좀 되었다. 무거운 항아리를 이고 겨우 우물가에 당도한 순간 언년이는 어디선가 아기 자지러지게 우는 소리를 들었다. 이상한 낌새에 황급히 집으로 달려가보니 잠에서 깬 아기가 화로의 재를 조막만한 두 손으로 쥐고 흐트리면서 울고 있었다. 장작불이었으면 그 뜨거움에 얼른 손을 뗐을 것을, 뭉근한 열기의 화롯재는 서서히 아이의 손을 녹이고 있었다. 얼른 아기를 들쳐업은 언년이는 병원으로 달렸고 그 와중에 길에서 만난 남편에게는 집에 두부찌개를 해 놓았으니 가서 식사하시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병원에서 만난 의사는 아기가 이지경이 될 때까지 뭐한 거냐고 언년이를 혼냈다. 치료에 들어갔지만 아기의 손 마디는 하나 하나씩 끊겨갔고 겨우 남은 것은 양 손의 엄지와 검지 뿐이었다. 언년이의 영혼도 뚝뚝 부러지는 기분이었다. 언년이는 하늘에 기도했다. 아기를 손가락 없는 병신으로 살게 하느니 차라리 데려가 달라고. 그렇게 자고 일어나니 아기는 숨이 없었다. 아기는 채 백일을 살다 갔다.

첫 아들을 잃은 언년이는 그 뒤로 다시 아들을 얻기 위해 아이를 낳았다. 그것도 계속 계속 낳았다. 하지만 첫아이부터 다섯아이까지 모두 딸이었다. 아들을 얻고픈 마음에 딸아이들 돌림자를 아들 자(子)로 하였다. 그 중 명자는 언년이의 다섯째 딸이었다. 명자는 이제 제법 잘 걸어다닐 즈음에 소아마비에 걸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잘 걸어다니던 아이가 갑자기 힘없이 주저앉아 버리니 언년이는 눈이 뒤집혔다. 아이를 업고 이곳 저곳을 다닌 결과 한 한의원에서 소아마비라는 판정을 내렸다. 집에서 한의원까지는 20리가 넘는 길. 언년이는 치료를 위해 명자를 업고 그 길을 걸었다. 언년이는 마음이 아파서 길 중간 언덕에 앉아 섦게 울었다. 그 시절 아이들은 쉽게 아프고 쉽게 죽었다.
한의원에서는 환약을 주며 딱 열알까지 먹이되 그 이상 먹이면 머리가 커지니 주의하라고 당부하였다. 언년의 지극정성으로 명자는 다시 잘 걷게 되었다. 뛰면 다리를 절뚝이는게 보이긴 하지만 그냥 봐서는 명자의 소아마비를 알 수 없다. 같은 동네의 다른 집 아이도 소아마비에 걸려서 똑같은 약을 썼지만 그 아이는 명자만큼 회복되지는 못했다.

언년은 다섯의 딸 뒤에 내리 연이어 두 아들을 낳았다. 이제 그만 낳아도 될 것을 제대로 된 피임법이 없던 시절이라 언년은 다시 임신을 하였다. 하지만 달이 차고 기울어도 아이는 나올 생각을 안하고 어느 날 시작된 하혈에 언년은 숨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당시엔 아이 낳다 죽는 이가 허다했다. 결국 미군의 차를 얻어타고 도립병원으로 향한 언년은 아이를 낳으려면 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 시절의 병원은 환자식이 제공되지도 별 다른 비품이 있던 것도 아니어서 병원에서 머물려면 세간을 싸들고 와야했다. 그러나 일 나가야 하는 남편과 학교 가야하는 아이들의 밥을 챙길 걱정에 언년은 병원에 오래 머물러야만 하는 수술을 거부했고, 어떻게든 본인의 힘으로 아이를 낳겠다고 선언, 숨이 넘어가는 순간을 몇 번이나 이겨내고 결국 스스로 아이를 낳아내었다. 그러나 아이가 뱃속에서 너무 자란 상태였기에 병원에서는 아기를 며칠 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지만 역시 언년은 식구들 끼니 걱정에 서둘러 아기를 안고 병원을 나온다. 상황을 모르는 동네 사람들은 길 높은 언덕에 서서 언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 길 끝에서 하얀 바탕에 빨간색 십자가가 그려진 지프자가 동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보통 그런 차는 시신을 운구하는 차이기 때문에 동네 아낙들은 언년의 아이들을 하나씩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집 앞에 당도한 지프차의 뒷문이 열리고 아기를 안은 언년이 집에 걸어내려섰다. 언년의 아이들은 순간 지옥과 천국이 바뀌는 경험을 했다. 새로 태어난 아기의 눈망울은 크고 똘망똘망했다. 방에 아기를 뉘이자 언년의 7남매는 순식간에 아기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이제 겨우 되었다며 한 쪽에서 숨 고르며 누워있는 언년에게 둘째 춘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아기 얼굴이 이상해. 곁에 있던 아낙들이 아기의 얼굴을 확인하곤 언년의 눈을 가렸다.
아기는 절명했다. 너무 크게 태어난 탓에 병원에 두고 경과를 지켜봤어야 했는데 그냥 집으로 데려온 것이 불찰이었다. 아기는 흰 천에 싸여 윗목에 놓였다. 곧이어 마을의 어른이 아기를 지고 산 언덕에 묻었다. 세살바기인 막내 남동생은 아기를 보낼 수 없다고 산무덤 주변을 데굴데굴 구르며 울었다.

언년은 강골이었다. 겨울에도 추위를 모르고 맨발로 다닐 정도였다. 언년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1.4 후퇴를 모두 겪어내며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 그런 그녀에게조차도 일곱 남매의 끼니를 거르지 않고 키워내는건 부부에게 잔인할 정도로 고된 일이었다. 그 당시 쌀밥을 먹지 못해 밥이 되지 못하는 여러가지 것들로 끼니를 때우는 일이 흔했는데도 불구, 언년의 아이들은 삼시 세끼는 밥을 챙겨 먹고 밀가루나 고구마는 간식으로만 먹었다. 가난했지만 일곱 남매의 입이 비는 순간은 없었다. 그만큼 부지런히 부부는 항아리를 만들어 장에 내다 팔았다.

어제 언년이 우리집에 다녀갔다. 사 년전 파주에 묻은 남편을 보러가기 위해서다.
언년의 남편인 영택이 죽던 날에 내 어머니이자 언년이의 넷째딸인 애자는 ‘아버지 수고하셨어요’ 이 한 마디만 외치여 울부짖었다.
난 이제사 그 의미를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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