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 고향이지만 밖에 나와 산 지 4년째 다. 부모님께 독립하는 것이 어릴 적부터 소원이기도 했고, 나이 찬 자식이 부모님과 부대끼기도 힘들어서다. 그래도 2~3주에 한 번은 꼬박꼬박 집에 들러 얼굴을 비춘다.
살가운 딸은 아니었다. 사실 무뚝뚝하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 극도로 절약하시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왔기에 미의식이 나이에 맞지 않았던 건방진 꼬마는 초라해 보이는 가족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거기에 집안 공기를 불안하고 예민하게 만드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는 동안 성격이 점점 내성적이고 자신감이 없어졌다.
왜 우리 집은 다른 집들처럼 대화도 많지 않고 웃지도 않는지, 돈이 생겨도 쓸 줄도 모르는지, 아빠는 세상만사에 뭐가 그리 불만이 많아서 다른 가족들을 힘들게 하는지 등등의 것들이 싫었다. 항상 그 분위기에 눌려 있었던 같았다.
하지만 대학에 가고 스타트업을 하면서 내게 조금씩 변화가 왔고, 잘은 모르겠지만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벗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족과의 관계를 몇 발자국 떨어져서 보는 시각이 내게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밖에 홀로 나와 살면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정신적인 여유와 힘이 내게 생겼고, 나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고 피하던 존재인 아버지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부딪힐 수 있었다. 그렇게 두려움을 걷어내고 나니 아버지의 고단함과 외로움이 보였고, 오랜 시간 그 옆에서 힘들었음에도 어쩌질 못하고 참고만 계셨던 어머니의 마음도 보였다.
컨트롤이 안 될 정도로 제멋대로인 데다가 철없는 내 언행에 상처를 많이 받으셨음에도, 갖은 힘을 다해 욕심많은 딸의 원하는 바를 모두 들어주셨던 두 분, 내 부모님.
지금도 딱히 애교있는 딸은 아니고 결혼하라고 잔소리하시면 부담감에 도망가버리는 딸이지만, 예전보다 부모님의 말을 잘 듣고 사려깊어지려 노력을 하고 있다. 사실 부모님이 바라시는 건 내가 그 분들께 무언가를 해드리기 보다는, 내가 사소한 결정이라도 부모님과 같이 논의하고 그 생각을 깊이 존중해드리는 것이겠지… 스스로의 생각에 갇혀 멋대로 치달아버리는 딸이 그 분들께 얼마나 상처였을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깨닫는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집에 갈 때마다 열심히 슈돌을 보며 남의 애기 재롱에 즐거워 하시는 부모님 얼굴보기가 여간 죄송하고 부담되는 게 아니다. 그래도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따뜻한 한끼에, 아버지가 수줍게 챙겨주시는 감기약에, 오빠가 만들어주는 달달한 스무디에 내가 참으로 세상에 이런 사랑을 받고 있구나 하는 감사함으로 자취방으로 돌아오곤 한다. 그것이 아무리 내가 울며 지치고 힘들어도 다시 봄날의 물오른 가지처럼 생을 뻗어나가게 해주는 가족의 굵은 뿌리이다.